디올 화려한 글자 뒤 숨은 이야기

명품이란 말을 들으면 흔히 ‘에·루·샤’라는 약어를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들 명품 업체도 패션 화보나 앰배서더 선정, 패션쇼 참석 등으로 화제를 일으키곤 하는데, 올해는 김건희 여사의 디올 백 수수 의혹의 파급력을 이기긴 어려워 보입니다.


디올(Dior)

유엔안보리 대북 제재위원회가 디올 측에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가방이 디올로 추정된다며 확인 요구 서신도 보냈는데, 남북이 해외 고가 브랜드를 두고 뉴스에 나란히 등장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디올’이란 화려한 글자 뒤 숨은 이야기들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뉴스에 거론되는 ‘사건’은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크리스챤 디올’과 ‘카트린느 디올’이 살아있다면, 자신들이 목숨 바쳐 지킨 디올의 지금을 보고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숨은 이야기

디올은 패션계에서 여성의 편에서, 여성성을 드높이는 브랜드로 꼽히는데, 그 시작은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챤 디올(1905~1957)이 전쟁으로 지친 여성들에게 우아한 아름다움을 즐길 권리를 주고 싶다는 의미가 담긴 ‘뉴 룩'(1947)을 선보이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뉴 룩(New Look)’이란 혁신적인 패션 뒤엔 한 여성이 있었는데, 크리스챤 디올보다 12살 어린 카트린느 디올입니다. 프랑스 노르망디 부유층에서 자란 남매였지만, 1930년대 대공황으로 집안이 망하고 어머니까지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크리스챤이 미술 컬렉터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패션 디자인에 빠져드는 동안, 카트린느는 모자 만드는 직공으로 일하다 1940년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가입해 정보요원으로 일했습니다.

체포

1944년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된 카트린느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고, 동료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다물었던 그녀는 히틀러의 유일한 여성 강제 수용소인 ‘라벤스브뤼크’에 수용되었습니다.

‘라벤스브뤼크’는 ‘지상의 지옥’이라 불릴 정도로 열악한 환경을 갖고 있으며, 6년 동안 이곳에는 약 13만 명의 여성이 갇혔고,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3만 명에서 9만 명까지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곳에 갇힌 프랑스 여성들과 카트린느는 연합군의 공세를 피해 이동하는 독일군에게 다시 이끌려 1945년 2월 독일 라이프치히 인근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크리스챤이 동생을 꺼내기 위해 관계자들을 접촉했지만 무산되었습니다.

한 떨기 꽃

연합군의 독일을 향한 폭격은 ‘죽음의 행진’으로 불릴 정도였고, 포로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 장교의 “포로도 적에게 산 채로 넘겨선 안 된다”라는 외침 후 연합군의 집중포화는 잦아들었고, 자욱한 먼지와 불구덩이 속에서 카트린느는 숨을 쉬었습니다.

1945년 5월 파리로 돌아온 카트린느의 모습은 오빠인 크리스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녀의 얼굴엔 혹독한 고문의 흔적과 수용소의 참상만이 화석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전쟁 중 부유층만을 위해 디자인했던 크리스챤은 동생과 소식이 끊어진 뒤 디자인에 대한 의미를 잃었는데, 동생을 다시 만난 그는 디자인 열의를 다시 꽃피웠습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몰골로 겨우 숨만 쉬던 동생은 비록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피폐했었지만, 그에겐 가장 아름다운 꽃처럼 보였고, 더 아름답게 꽃피우게 하고 싶었습니다.

뉴 룩 디자인 의상 모습

뉴 룩(New Look)과 미스 디올 탄생

크리스챤 디올은 동생 카트린느가 다시 웃을 날만을 기다리며, 섬세한 꽃잎으로 이루어진 화관에서 영감을 받아 부드럽게 패딩 처리된 실루엣을 구상했고, 일 년이 지나 동생이 차린 매장에서 패션쇼를 선보였습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여동생과 디자이너로서의 생명을 잃을 뻔한 오빠가 마치 한 몸처럼 피운 꽃이 바로 ‘뉴 룩’이었고, 카트린느를 닮은 꽃향기는 ‘미스 디올’이란 이름을 달고 패션쇼 공간을 가득 메웠는데, 이것이 요즘의 ‘미스 디올’ 향수입니다.

미스 디올 향수

꽃 중개인 카트린느 디올

카트린느 디올의 생존기는 1952년 게슈타포 재판 증인으로 그녀가 나서면서 알려졌고, 이후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을 받았고, 프랑스 레지스탕스 자원 전투원 십자 훈장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에서는 용맹의 십자가, 영국에서는 자유를 위한 용기에 대한 왕의 메달도 받아 훈장의 주인공으로 엄청난 부(富)를 누리며 호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국제 꽃 중개인으로 2008년 91세 명이 다할 때까지 평생 조용히 꽃을 가꾸며 살았고, 그녀의 손끝은 화려한 매니큐어가 아닌 재배하던 풀잎에 물들어 평생 초록색이었다고 합니다.


화려한 글자 뒤 이야기

카트린느 디올의 숭고한 삶과 불의와 악에 맞서는 레지스탕스의 항거 정신을 조금이라도 인식했다면, 뉴스에 거론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들의 디올이 검은 손이 오가는 듯한 수수 의혹 속 ‘물건’으로 전락한 것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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